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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에 관한 이야기

지그문트 프로이트

by 나마스떼_()_ 2023.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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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지방 유대인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경제적 어려움에도 아들의 명석한 지적 능력을 키워 주기 위해 노력했다.

프로이트는 김나지움(Gymnasium)에 재학 시 성적이 우수하고 문장력도 뛰어났다.

후에 1873년 빈(Vienna)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1881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재학 기간에는 19세기의 위대한 생리학자  브뤼케(Bruecke) 교수의

'살아 있는 유기체는 화학과 물리학의 법칙이 적용되는 하나의 역동적 체계'라는

급진적인 견해에 매료되었고,

그 외에 '에너지는 변형될 수는 있어도 파괴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에너지가 체계의 한 부분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반드시 체계의 다른 부분에 나타난다.'고 하는

헬름홀츠(Helmholtz)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역학의 법칙들을 인간의 심리 현상에 적용, 역동심리학으로서의 정신분석을 창안하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의 학문적 관심은 의학과 관련된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

 

철학, 물리학, 생물학, 동물학 등 여러 분야에 호기심을 가졌다.

1875년부터 1878년 사이에 다윈(Darwin)의 진화론을 지지하는

헤켈(Haeckel) 학파에 속해 있던 클라우스(Claus)의 동물학 실험실에서도 일을 하는 등

프로이트의 발생학적 사고에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는 히스테리, 몽유병, 다중성격과 같은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최면술을 적용하고 있었다.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히스테리 최면술 연구로 명성을 얻은 샤르코(Charcot)가 일하던 병원에 머물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임상경험을 통해 최면술에 의한 히스테리 치료 효과에 대해서는 회의를 갖게 되었지만,

샤르코의 강의와 임상적 실험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샤르코와의 만남은 프로이트가 신경학자에서 정신병리학자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후 정신병리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에 반대하는 내용의 논문들을 썼다.

그는 히스테리 증상이 뇌의 기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충격적인 경험을 소화할 수 없어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1886년에 빈으로 돌아온 프로이트는 베르나이스와 결혼하여 세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나 프로이트(Anna Freud)는 훗날 유명한 아동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빈에서 프로이트는 의사인 브로이어(Breuer)로 부터

환자가 자신의 증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히스테리 증상이 치료되는 방법(정화법)을 알게 되었다.

브로이어의 방법이 환자치료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와 함께 정화법 치료 사례들에 관한 저서 Studies in Hysteria를 출판하였다.

이 저서가 완성된 뒤 두 사람은 히스테리에 있어서 성적(性的) 요인의 중요성에 관한 견해 차이로 결별하였고,

프로이트는 최면요법이나 정화법과는 또 다른 자유연상법(free association)을 개발하고 임상 치료에 적용하였다.

그는 성적 갈등이 히스테리 증상의 원인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이유로 1896년 빈 의사회에서 강퇴되었다.

프로이트는 어머니와의 관계는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복잡하였다.

1896년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의식적-무의식적 죄의식으로 그는 고통스러워하였다.

자신의 꿈에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성격 발달의 역동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자기분석에 몰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후에 정신분석을 구축하는 시작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프로이트는 환자에게서 얻은 자료들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무의식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꿈을 분석하고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탐색함으로써

자신의 내면 역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환자들과 자기 자신 분석에서 얻은 지식을 근거로 하여

정신분석의 기초를 이루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1900년에 그의 이론에 관한 최초의 위대한 업적인 꿈의 해석을 출간하였다.

이 책이 출판된 후 프로이트는 정신병리학회로부터는 무시되었지만,

곧 의료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02년에는 젊은 의사들이

정신분석의 이론과 실제에 관심 두고 모여들어

정기적인 연구모임이 생겼고,

빈 정신분석 연구회(Vienna Psychoanalytic Society)로 발전하였다.

 

1909년 미국의 클라크대학교 총장 홀(Hall)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서 여러 차례 강연하는 등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추종자가 늘어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브로이어(J. Breuer), 아들러(A. Adler), (C. Jung) 등과 같은

동료와 후학들이 인간 행동의 동기로서 성적 충동을 주장하는 프로이트를 반대하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었다.

 

아들러와 융과의 결별 후

저항과 전이 개념, 원초아 · 자아 · 초자아의 구조론, 생의 본능에 대비하는 죽음의 본능의 제창 등

프로이트 이론은 수정과 발전을 거듭하였다.

1914년 무렵에는 히스테리 환자들이 실제 일어난 것처럼 보는 외상(trauma) 혹은

무의식적 환상이 병의 원인이 된다는 점을 알아내고,

실재적(實在的) 현실 외에도 심리 내적인 현실이 존재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적 환상의 기능과 그것이 지닌 힘을 발견하였다.

아동들도 무의식적인 환상과 성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 나름대로 성에 대해 미숙한 해석을 함으로써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다는

아동기 성욕 이론을 정립하였다.

프로이트는 아동의 순수성에 대한 금기를 깼다며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

 

1920년대에 무의식(unconscious)과 억압(repression)에 관한 연구에 집중하였고,

종교, 도덕성, 문화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다수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프로이트는 매우 열정적으로 일에 몰입하여

하루에 무려 18시간이나 연구에 전념하는 날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집필의 결과로 정신분석에 관련된 전집은 총 24권이나 된다.

그의 학문적 생산성은 구개암(口蓋癌)으로 수십 번의 수술을 받았던 생애 후반까지 계속되었고,

1939년 런던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프로이트는 인간 행동에서 무의식의 것과 성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원초아(id) · 자아(ego) · 초자아(super-ego) 사이에서의 성 심리 발달과

동력의 해답을 근거로 하는 성격 이론을 개발하였다.

원래는 신경증의 한 치료법으로 발전시킨 학문이 인간 심리 일반에 대해서,

정신의학 · 심리학 · 사회학 · 인류학 등 각각 별개로 취급되고 있던 사상들을

같이 연구하는 길을 열어 예술작품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그의 정신분석 발견은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지동설이나

다윈(Darwin)의 진화론에 필적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오늘날 상담이나 심리치료이론 또는 기법의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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